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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공간이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질 때, 그곳은 다시 한번 살아난다. 폐공간을 전시회 장소로 리디자인한 사례는 단순한 용도 전환이 아니라, 공간의 시간을 다시 걷고, 그 틈을 창조의 언어로 채우는 작업이었다. 건축의 흔적과 예술이 만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감정은, 온전한 새로움이라기보다 잊힌 시간의 결을 따라가는 복원에 가까웠다. 금이 간 벽면, 녹슨 철제 계단, 오래된 콘크리트 바닥은 감춰야 할 결함이 아니라, 전시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폐공간을 전시회장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지 장소를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매개시키는 디자인의 과정이었다. 시간의 침묵 속에서 공간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폐공간 리디자인의 배경과 장소 선택
이 전시 프로젝트는 수도권 외곽의 한 산업단지 내 폐공장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은 1990년대 중반까지 금속 부품을 생산하던 3층 구조의 공장이었지만, 외국계 자본의 철수 이후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왔다. 건물은 외벽이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었고, 천장은 곳곳이 새고 있었으며, 내부 바닥은 오랜 습기와 먼지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기획자는 이 공간이 가진 비정형의 구조와 긴 시간의 흔적을 ‘완성되지 않은 전시관’이라 표현했다. 그는 전통적인 화이트 큐브 갤러리가 담아낼 수 없는 비가공의 분위기와 거칠고 불완전한 공간의 리듬이 오히려 현대 예술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소 선택에서 핵심은, 전시의 주제가 공간과 맥락적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였다. 기획자는 이번 프로젝트의 키워드를 ‘산업 이후의 인간성’으로 설정했고, 이에 따라 산업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공간이 자연스럽게 전시 콘셉트와 결합되었다. 건물 전체를 개조하지 않고, 구조의 일부를 그대로 두되 안전 보강만을 진행한 방식은 오히려 공간을 더욱 강력한 메시지로 만들어냈다. 전시의 성격에 맞게 ‘비어 있음’과 ‘낡음’을 보존한 선택이 결과적으로 관람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주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전시 동선과 공간 구성의 전략
리디자인의 핵심은 단순히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머물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의 디자이너는 공간을 단순한 전시물의 배경이 아닌, 전시의 공동 주체로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작품을 ‘보는’ 장소가 아니라, 공간 자체를 ‘경험하는’ 장소로 전환하는 것이 이번 리디자인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관람자가 수동적으로 작품 앞에 멈춰 서기보다는, 공간을 ‘걷고 머무르고 느끼는’ 동선 속에서 능동적으로 작품과 상호작용하길 원했다.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 공간을 해석하는 관람자의 감정선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점을 설계에 반영했다.
기존 공장의 층고 차이와 비대칭 구조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각의 층고, 골조, 기둥 간격 등을 그대로 활용하여 층별로 전시의 성격을 구분하는 전략을 택했다. 1층은 가장 넓고 천장이 높은 공간으로, 영상 설치물과 대형 조형물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개방형 전시 구역으로 구성되었다. 벽체는 일부 철거되어 시선의 흐름을 막지 않도록 했으며, 중앙에는 작품 대신 커다란 공장 기계 하나를 그대로 남겨 두어 공간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상징적 지점을 만들었다.
2층은 보다 밀도 있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비교적 낮은 천장과 좁은 통로는 작가 개인의 설치 작업을 위한 집중형 구조로 설계되었다. 벽면은 일부러 거친 시멘트 질감을 유지했고, 창문은 빛이 직접 들어오지 않도록 필름과 커튼으로 조절했다. 이로 인해 관람자는 한 공간 안에서도 완전히 다른 시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은 벽이 아니라, 바닥이나 천장에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관람 동선은 자유롭게 휘어지며 다양한 체험의 리듬을 형성했다.
3층은 가장 어두운 공간이었으며, 창이 거의 없고 조명의 설치도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음향 기반의 몰입형 전시로 이어졌다. 전기 설비는 최소화되고, 입장 인원을 제한하여 작품이 아닌 ‘공간 안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관람의 끝 지점이 아니라 감각의 재설정 구역이었다. 공간에 들어서면 소리와 어둠이 동시에 밀려들고, 그 안에서 관람자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탐색하게 된다. 설계자는 이 구역을 ‘감각의 회복지점’이라 명명하며, 시각을 주로 사용하는 전시의 흐름 안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정적의 공간’을 제안한 것이다.
동선은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래 구조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입구와 출구는 기존의 공장 문을 그대로 활용했고, 벽체와 천장의 주요 구조도 변경 없이 유지되었다. 새롭게 추가된 것은 조명과 안전장치뿐이었다. 통로의 조명은 간접 조명 위주로 배치되었으며, 일부 구간에는 그림자가 극적으로 형성되도록 설계해 관람자의 심리적 몰입을 유도했다. 계단과 난간은 보강하되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철재로 마감되었고, 안내 표시는 작은 폰트로 낮은 위치에 배치되어 공간의 시각적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되었다.
간판, 안내문, 번호표와 같은 시각 정보는 모두 공간의 물성과 어울리도록 디자인되었다. 흰색이나 원색은 배제되고, 벽면 색상과 유사한 중간 톤을 사용해 공간 전체의 균형감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표시는 작품을 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다음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다. 이러한 설계는 결과적으로 관람자의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작품만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와도 하나의 긴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만들었다. 관람자는 단지 ‘보는 사람’이 아닌, 공간 안을 함께 호흡하고 살아 있는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술과 감각의 균형: 조명과 음향 디자인
전시 공간으로 리디자인된 폐공장은 기존 건축 구조의 한계로 인해 조명과 음향 설계가 매우 까다로웠다. 대부분의 벽면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철재 골조가 드러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음향의 반사와 울림이 예상보다 커졌고, 조명 역시 벽 반사광 없이 독립적으로 설계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빛의 강도보다 그림자의 각도를 중심으로 조명을 배치했다. 간접 조명이 주를 이루었고, 일부 작품에는 움직이는 빛을 활용해 공간의 흐름과 작품의 시간성을 일치시켰다.
음향은 벽면과 바닥에 흡음 패널을 직접 설치하는 대신, 스피커의 위치와 방향을 조정해 ‘흘러가는 소리’를 만들었다. 특정 구역에 머무르면 음악이 작게 들리고, 이동하면서 사운드의 성격이 변하는 방식은 관람객에게 물리적 위치에 따라 감각이 바뀌는 경험을 제공했다. 기술은 철저히 보조 역할에 머물면서도, 공간의 감정을 세밀하게 조율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이처럼 빛과 소리는 공간의 균형을 잡아주는 축이 되었으며, 단순한 전시장의 기능을 넘어선 감각적 서사의 기반이 되었다.
지역과 연결된 콘텐츠 기획
이 전시회는 단순히 폐공장을 활용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넘어, 지역과 예술을 연결하는 문화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시 기간 동안 지역의 청년 작가 5인이 참여한 연계 워크숍이 함께 열렸고, 지역 주민 대상 공간 투어 프로그램과 교육 세션도 마련되었다. 특히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공장 속 미술관 체험’ 프로그램은 예상보다 높은 참여율을 기록하며 지역 사회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전시장을 찾는 외지인과 지역 주민이 공간 안에서 교차하고, 각자의 속도로 공간을 경험하는 모습은 리디자인이 단지 건축적 완성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관계망을 재구성하는 힘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일부 작가는 지역 산업의 퇴색과 노동 기억을 주제로 작업을 구성했으며, 전시장 외부 벽면에도 지역의 과거 산업 풍경이 녹아든 벽화가 그려졌다. 리디자인은 결국 장소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함께 호흡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공간이 지역 안으로 스며들면서, 전시는 다시 지역의 일상이 되어갔다.
폐공간 리디자인이 남긴 질문
전시가 끝난 뒤, 폐공장은 다시 비워졌다. 그러나 이번 리디자인 경험은 단지 일회성 이벤트로 머무르지 않았다. 프로젝트 종료 후에도 여러 기획자와 예술가가 공간에 관심을 보였고, 지역 내에서도 이 장소를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정착시키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공간이 단지 '사용되었음'을 넘어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폐공간의 리디자인은 흔히 생각하는 시설 개보수나 기능 전환을 넘어선, 장소성과 기억을 중심으로 한 정서적 재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질문도 남는다. 전시는 아름다웠지만, 그 이후는 누구의 몫인가. 장소는 프로젝트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일시적 전시 공간이 아닌, 지속 가능한 문화 인프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리디자인 그 이후의 전략이 필요하다. 전시가 아닌 공간 자체를 운영의 대상으로 보려면, 이 리디자인은 시작에 불과하다. 결국 폐공간의 전시화는 ‘끝’이 아니라 ‘묻는 방식’이 된다. 그 질문이 살아 있는 한, 이 공간은 다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디자인
폐공간을 전시회 장소로 리디자인한 사례는 단순한 재건축이 아닌, 기억과 감각, 지역과 예술이 얽힌 총체적 경험의 설계였다. 공간은 더 이상 정지된 장소가 아니었고, 전시물의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로 관람자와 감각을 교환하며 살아 움직였다. 리디자인은 기술이 아닌 태도이며, 미감이 아닌 맥락의 작업이다. 폐시설 리브랜딩의 핵심은 결국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며, 그 답은 언제나 공간의 고유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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